흑백입니다. 2012년 영화인데요.
처음엔 이게 좀 걸렸어요. 옛날 영화 흉내인가 싶었는데 등장인물들이 스마트폰 쓰고 페이스북 얘기를 합니다. 그냥 지금 얘기를 흑백으로 찍은 거예요.
왜 그랬는지는 나중에 얘기하겠습니다.
프란시스는 스물일곱이고 뉴욕에서 무용을 해요. 정확히는 무용단 예비 단원입니다. 연습은 나가는데 무대에는 잘 못 서요. 돈은 없고요. 카드 안 긁히는 장면이 몇 번 나옵니다.
집도 없습니다. 없다기보다 계속 바뀌어요.

주소가 챕터 제목입니다
이게 이 영화 구조인데 좀 특이해요. 새 집에 들어갈 때마다 화면에 주소가 큼직하게 뜹니다. 그게 챕터 제목이에요.
일곱 번쯤 바뀝니다. 두 시간이 안 되는 영화에서.
처음엔 멋으로 넣었나 했는데 아니더라고요. 프란시스는 이사할 때마다 뭘 하나씩 잃습니다. 친구랑 살던 집에서 나오면서 그 친구를 잃고, 다음 집에서 돈을 잃고, 결국 모교 기숙사까지 들어가요. 스물일곱에 대학 기숙사요.
근데 화면엔 그냥 주소만 뜹니다. 아무 설명이 없어요.
싸운 게 아닌데 멀어집니다
이 영화 진짜 주제는 연애가 아니고 우정이에요.
소피라는 친구가 있습니다. 대학 때부터 같이 살았고 서로를 제일 잘 아는 사이예요. 초반에 둘이 공원에서 노는 장면 보면 진짜 사이가 좋습니다.
근데 소피가 먼저 나갑니다. 더 좋은 동네로 이사 가고, 남자친구 생기고, 결국 다른 나라로 떠나요.
프란시스는 그대로고요.
누가 잘못한 게 아니에요. 싸우지도 않았고요. 한 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한 명이 안 넘어가면 그냥 그렇게 되잖아요.
스무 살 때가 생각나요. 갓 졸업하고 친한 친구는 대학에 갔고 저는 바로 취업을 했거든요.
처음엔 자주 만났어요. 주말마다 보고 전화도 길게 했고요. 근데 어느 순간부터 할 얘기가 달라지더라고요. 저는 직장 선배들 얘기를 하고 그 친구는 과 사람들 얘기를 하는데, 서로 모르는 사람 이름이 계속 나오니까 대화가 자꾸 끊겼습니다.
그러다 약속을 한 번 미루고, 다음에 또 미루고, 그렇게 됐어요.
서운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. 그때는 저도 바빴고 새로 만난 사람들이랑 지내는 게 재밌었거든요.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건데, 지금 와서 생각하면 좀 아깝기도 해요.
소피 역할 배우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요.
이 사람이 나오는 분량이 생각보다 적습니다. 중반 넘어가면 거의 안 나와요. 그런데 존재감은 끝까지 남습니다. 프란시스가 뭘 하든 소피 얘기가 나오거든요.
후반에 둘이 다시 만나는 장면이 있어요. 술 마시고 예전처럼 떠드는데,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. 둘 다 그걸 아는 표정이에요. 그러다 새벽에 결국 한 번 부딪힙니다.
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제일 아픈 대목인 것 같아요. 화해도 아니고 절교도 아니고, 그냥 서로 달라졌다는 걸 확인하고 끝나거든요.
보기 힘든 장면들이 좀 있습니다
프란시스가 눈치가 없어요. 이게 은근히 중요합니다.
저녁 자리에서 자기 얘기를 너무 오래 해요. 분위기 식는데 본인만 모르고 계속 떠듭니다. 그러다 갑자기 아 이상하다 싶어서 멈춰요.
이런 장면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. 볼 때마다 좀 괴로워요. 저 사람 왜 저러나 싶다가, 나도 저런 적 있는데 싶어서.
근데 영화가 프란시스를 비웃진 않습니다. 고쳐야 할 결점처럼 안 다뤄요. 그냥 저런 사람이라고 두는데 그게 좋았습니다.
중간에 갑자기 파리에 가는 대목도 있어요. 친구가 아파트 쓰라고 했고 마침 새 카드가 왔거든요. 물론 그 돈은 다 빚이 되고요.
근데 파리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납니다. 시차 때문에 자다가, 연락한 사람은 답이 없고, 나가면 문 닫았고. 그러고 돌아와요.
보통 영화면 파리에서 뭘 깨닫고 오잖아요. 이건 그냥 돈만 씁니다. 웃긴데 좀 그렇더라고요.
거리를 뛰는 장면
프란시스가 뉴욕 거리를 뛰는 장면이 있어요. 이유가 없습니다. 그냥 기분이 좋아서 뛰어요. 음악 깔리고 사람들 사이로 계속 달립니다.
이 장면 앞뒤 상황이 하나도 안 좋습니다. 돈도 없고 일도 안 풀리고 친구도 떠났어요. 그런데 저 사람은 지금 신나서 뛰고 있습니다.
저는 이 장면이 좀 이상했어요. 저 상황에 어떻게 저러지 싶어서요.
성향 차이인 것 같기도 합니다. 저 같으면 저럴 때 집에 가만히 있었을 것 같거든요. 그래서 부러운 마음도 좀 들었고요.
그리고 음악이 좋습니다. 이건 나중에 알았는데 프랑스 옛날 영화들에서 쓰던 곡을 가져다 쓴 거라고 하더라고요.
뉴욕 거리에 프랑스 음악이 깔리니까 좀 붕 뜬 느낌이 나는데, 그게 프란시스한테 어울립니다.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 같잖아요.
그래서 흑백인 것 같습니다
프란시스가 사는 집들이 다 낡았어요. 벽지 벗겨져 있고 가구도 안 맞고 좁습니다. 컬러로 찍었으면 그냥 초라했을 거예요.
흑백이니까 그게 좀 낭만처럼 보입니다. 실제론 가난한데 화면은 예뻐요.
이 간극이 프란시스랑 똑같습니다. 상황은 엉망인데 본인은 즐거워 보이잖아요. 그러니까 흑백이 이 영화 시점인 셈이죠. 프란시스 눈엔 자기 인생이 이렇게 보인다는 거.
뭐 이건 제 생각이고 감독이 그냥 옛날 영화를 좋아해서일 수도 있습니다.
제목 얘기
왜 프란시스 하인지는 마지막에 나와요. 스포일러라고 하기도 뭐한 게 그냥 소소한 장면입니다.
우편함에 이름표를 붙이는데 종이가 짧아서 다 안 들어가요. 성이 잘립니다. 그게 마지막 장면이에요.
이름 잘린 채로 붙어 있는 게, 아직 완성 안 된 사람이 자기 자리 하나 갖게 된 것처럼 보이더라고요. 완벽하진 않은데 일단 붙였잖아요.
맞는 해석인지는 모르겠습니다. 그냥 종이가 짧았던 걸 수도 있고.
전에 소공녀 리뷰를 쓴 적이 있는데 이 두 편이 묘하게 닮았어요. 둘 다 집 없는 여자 얘기고, 둘 다 친구 집을 전전하고, 둘 다 세상 기준으론 실패한 상태인데 본인은 그렇게까지 불행해 보이지 않습니다. 다른 건 온도예요. 소공녀가 훨씬 차갑습니다. 프란시스는 계속 뛰고 웃고 떠들거든요.
같이 보시면 재밌을 것 같아요.
이 영화 누구한테 맞을까
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면 아마 자기 얘기처럼 느껴지는 대목이 몇 번 나올 거예요. 저는 그 나이가 좀 지났는데도 그랬습니다.
친구랑 멀어져본 적 있는 분들한테도 맞고요. 이 영화가 그걸 정말 잘 그립니다. 큰 사건 없이 그냥 서서히 멀어지는 걸 두 시간에 걸쳐 보여줘요.
반대로 시원한 전개 원하시면 안 맞습니다. 프란시스는 끝까지 크게 성공 안 해요. 겨우 자기 자리 하나 찾는 정도입니다.
주인공이 답답하실 수도 있어요. 눈치 없는 장면이 계속 나오니까요. 그게 힘드시면 중간에 끄셔도 됩니다.
이게 재밌을까 의심하면서 봤던 것 같아요. 근데 계속 보고 있는 저를 보게 된 거 있죠.
예전 생각도 나고. 또 그때의 제 모습이 그리워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.
돈도 없고 앞도 안 보이는데 이상하게 겁은 없던 때가 있잖아요. 지금은 그때보다 형편이 나은데 뭘 새로 시작하는 게 훨씬 무섭거든요. 프란시스가 부러웠던 게 아마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.